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마 11:7-19)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그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마 11:7-10)."
많은 사람이 세례 요한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러유대 광야로 몰려 갔다.
그러나 그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가거나 왕궁에 거하는 자들처럼 비싸고 부드러운 옷 입은 이를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지자를 보러 갔다.
사실, 세례 요한은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다.
세례 요한은 성경에 예언된 약속의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보다 앞서 보내신 사자이다(말 3:1 참고).
그러나 그는 끝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배도자가 되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내리신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오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니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1-15)."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사자이기에, 실로 역대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는 말이 옳다.
그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선지자 가운데 마지막 선지자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 그리스도께 세례까지 베풀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하시고, '천국은 세례 요한 때로부터 침노를 당했다.'고 하셨다.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것은 세례 요한이 천국 밖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세례 요한을 순교자로 추대하고 있으나, 예수님의 평가는 이렇게 판이하게 다르다.
세례 요한은 천국의 외인(外人)이라 하신 것은 그가 처음 믿음을 버리고, 본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의심하는 배도자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이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침노를 당했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하고 율법에 기록된 예언이 세례 요한 때까지'라는 것은, 세례 요한의 역사로 구약 시대 곧 육적 이스라엘 시대가 마감되었음을 말해준다.
세례 요한이 역사를 마치고 옥에 갇힘으로써, 예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셨으며, 그로 인해 신약 시대가 열렸다.
말라기 3, 4장에 기록된바,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사자가 이 땅에 임하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다.
엘리야는 지금으로부터 약 2,900년 전, 하나님과 동행하며 많은 이적을 행한 후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예언자)이다(왕하 2:11).
말라기서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엘리야가 불 수레를 타고 이 땅으로 돌아와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성취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말라기서에 예언된 언약의 사자는 예수님이시며, '오리라 한 엘리야'는 세례 요한이다(마 17:10-13).
세례 요한을 '구약 성경에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말 3:1, 4:5)'라고 하는 이유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심령으로 와서, 예언 속의 엘리야가 이루기로 예정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다(눅 1:17)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언 속 엘리야의 실체가 아니라고 부인했다(요 1:19-21).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동역자가 되어야 할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는 결정타를 날린 셈이다.
세례 요한이 자신을 엘리야의 심령으로 온 사자라고 시인했다면, 사람들이 그를 임의로 대우하지(마 17:12, 막 9:13) 않았을 것이며, 나아가 예수님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는 세례 요한이, 그 다음에는 자신이 진리를 외쳐도 냉담하고 무관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를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함과 같도다(마 11:16-17)."
적어도 놀이가 성립되려면 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호응해야 한다.
아이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논다고 가정할 때, 한 쪽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며 맞장구치지 않고, 애곡하는 시늉을 해도 가슴을 치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놀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아무리 외치며 말씀을 증거해도 차갑게 외면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8-19)."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마 3:4) 청빈한 생활을 했으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는 생활을 했다(눅 1:15).
그런데 그것이 트집잡기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핀잔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말은 무시하면서, 세례 요한의 외적인 것을 들어 귀신이 들렸다고 억지스런 떼를 쓰며 욕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는가는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과 다른 교세를 형성하고 있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핍박하는 데만 모든 촉가깅 집중되어 있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도 하며, 설교도 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죄인과 셀리의 친구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하이며, 예수님을 저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하며 무시하는 처사이다.
특히, 이스라엘 율법사들과 제사장들은 자신들만 의롭다고 여기며 예수님고 세례 요한은 깔보았으나,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던 예수님의 삶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옳다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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